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해 시내산에 이르면서 절정에 달한 일련의 사건들은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영화 ≪십계≫에서 모세를 연기한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거나 시내산에 몰아친 천둥, 바람, 불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할 것입니다. 또 어쩌면 모세의 얼굴이 어떻게 빛났는지, 돌판에 계명이 어떻게 새겨졌는지, 혹은 산에서 울려 퍼진 하나님의 음성이 어땠는지에 우리의 이목이 집중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0:18-21). 분명 시내산에서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시내산에서 우리는 언약적 관계를 향한 하나님의 성품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시편 105:7-11)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서 확연히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출애굽기 19:6, 신명기 10:11). 그런데 21세기의 크리스천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들이 출애굽과 시내산 이야기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산기슭에 서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강한 불과 바람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했고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므로 시내산 사건은 그들에게 단순히 초자연적인 현상에 경외감을 느끼는 것 이상의 훨씬 더 심오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그들이 경험한 것은 이교도 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산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궁극적인 음성을 들었고 또 보았습니다! 그 음성의 근원은 그들의 조상들의 여호와, 다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0:1-6, 신명기 6:4-5). 히브리인들에게 나타나신 그분의 현현은 실제로 땅을 뒤흔드는 또 하나의 현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에 대한 놀라운 묘사와 같이 (출애굽기 34:6-7)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chesed, 헤세드)가 충만하신, 관계를 중시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 감히 말할 수 없는 그분의 이름(YHVH, 야훼)을 안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였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이교도 세계의 패러다임, 즉 여러 세대에 걸쳐 그들이 노예 생활을 했던 이교도 문화의 세계관과 대조해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이교도 세계는 어둠 속에 싸여 있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신의 노예로 창조되었고 영원히 노예 상태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신념으로 인류는 모든 것에서 신을 찾았으며, 자연의 웅장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에 대한 힘과 영향력과 통제력을 가진 신들과 여신들을 선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출애굽에 대한 데니스 프레이져(Dennis Prager)의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숭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연이란 결국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연은 토라(Torah, 창세기-신명기)의 신과 달리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숭배할 가치가 없습니다. 신은 선과 악과 정의에 몰두하지만, 자연은 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교도들은 그들이 사는 세계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힘에 직면하기 위해 다신교의 신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신화는 그들에게 상상 속 동화가 아닌 실제 삶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세계와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해답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신화 속 신들은 인간의 행동을 반영했고 그와 같이 행했으며, 때로는 인간보다 더 나쁜 모습을 보였습니다. 고대 근동 학자인 존 월튼(John Walton)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신화는 신들의 기원이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신들은 가족 관계로 존재했으며 세대도 있었습니다.”
월튼은 계속해서 이어갑니다.
“신이 개입한다는 개념을 고대인들과 논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관에서 신은 이미 우주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일에 개입한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신은 내부에 있었고 외부에 있지 않았습니다. 세계는 온통 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든 경험은 종교적인 것이었으며, 모든 법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었고, 모든 의무는 신에 대한 의무였으며, 모든 사건은 신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 신들은 먼 곳에 있었고 인간의 필요에 무관심했으며, 인간에 대한 사랑은 물론이고 그들의 마음이나 뜻이나 요구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인간이 신의 뜻을 알아내어 신을 달래야만 했습니다. 신들이 자연과 인류 역사에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고 믿는다면, 과연 어떻게 지진과 홍수와 기근 같은 맹렬한 자연 재해와 풍성한 번영의 시대 사이에서 신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이에 따라 신의 뜻을 분별하여 민족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신탁, 사제, 점쟁이, 마술사가 다신교 문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7:11, 사무엘상 28:7-20, 다니엘 2:1-3).
이 ‘중재자들’은 주문을 사용하고, 우상 앞에 제물을 바치고, 사원과 함께 신성한 공간을 관리하고, 축제를 열고, 동물을 희생제물로 잡고, 자연의 징조에 주목했습니다. 사제들은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마약을 이용한 황홀경에 빠지고, 어떤 예언자들은 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다고 믿었으며, 동물의 간, 심장 등 내장에서 신의 징조를 조사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스스로를 해치거나(열왕기상 18:28), 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이교도들은 신이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신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초자연적인 징후를 통해 전문적인 ‘중재자’만이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끊임없는 두려움과 절망과 단절 속에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신들은 한 순간에 사람들을 축복할 수도 있고 다음 순간에 그들을 괴롭힐 수도 있었습니다. 고대 앗수르에는 ‘모든 신에게 드리는 기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월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숭배자는 자신이 범한 것으로 추정되는 잘못에 대한 분노로부터 신을 달래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어떤 신이 화가 났는지 모르고, 그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매번 ‘내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신에게, 내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여신에게’라고 고백합니다.”
기도문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는 숭배자의 좌절에서 우리는 동정심마저 느끼게 됩니다. “나는 끊임없이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울었지만 그들은 내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나는 곤궁하고, 나는 혼자이고, 나는 볼 수조차 없다.” (사도행전 17:23 참조).
월튼은 계속해서 이어갑니다.
“이것이 계시가 없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곤경입니다. 결국 그들은 모든 진지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오직 전통을 고수하면서 폭풍우를 헤쳐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역할, 기능,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 전체에서 그리고 명백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봅니다 (출애굽기 34:6-7).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예슈아)이라는 이름이 “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대 이교도 세계에서는 신들의 이름 중 상당수는 가명에 불과했습니다. 다신교의 문화에 따르면, 신들은 거리를 유지하길 원했고 인류가 자신을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실제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교도들의 문제는 신들이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관계도 형성하지 않았으며, 음성도, 위로도, 사랑도, 희망도, 정의도, 구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점쟁이들이 신들 앞에 나아가 추상적인 메시지를 가져올 때도 공허할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정반대의 현실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계시하시고(창세기 12:1-3 참조), 그분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 문자 그대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베드로후서 1:19-21).
4세기 동안 애굽에서 나일강, 태양, 달, 농작물까지 모든 자연을 신들이 다스리는 것은 물론 개구리, 고양이, 악어, 소 등 모든 것 가운데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교도 세계에 잠겨 있던 히브리인들이 출애굽과 시내산에서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조상들의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역시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 세겜에서 언약이 갱신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여호수아 24장).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이 노예로 애굽 사람들을 섬겼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분의 백성들을 돌보셨을까요? 그분은 그들을 구원하실까요?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실까요? 아니면 그분 역시 애굽의 신들처럼 그들의 고난과 고통에 침묵하고 무관심하게 되신 것일까요? 이교도들은 가장 강한 신부터 가장 약한 신까지 신들에게도 순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바로는 “태양신의 아들(son of Ra, *역주: ‘Ra(라)’는 고대 이집트 태양신의 이름으로 이집트 신들 중 가장 강하고 위대한 힘을 지닌 신)”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의 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났던 것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던 것일까요? 이 모든 질문의 답은 시내산에서 응답되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레를 발하시며 그분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고 모세의 리더십을 통해 산기슭으로 모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 (출애굽기 19:3b-4). 하나님의 사랑은 풍성합니다. 그분께서는 그 나라, 곧 언약의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애굽기 19:5, 역대상 17:21 참조).
히브리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권능을 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알았고(출애굽기 3:14)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분의 뜻을 알라는 그분의 계명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20장). 그분은 정의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거룩함과 완전함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입니다! 그분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3)라는 첫 번째 계명에 명시된 바와 같이 다른 신들과 권세를 나누어 갖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여호와께서 거룩하시다(kadosh, 카도쉬)는 사실과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 앞에서 깨끗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레위기 11:44-45).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임재가 내려오는 동안 산 둘레에 경계를 정하라고 모세에게 지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출애굽기 19:21)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그들이 이교도 세계인 이집트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완전히 가려버렸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 앞의 광경에 압도되고 겁에 질려 모세에게 중재를 요청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출애굽기 20:18~21).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그분께서 맺으신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창세기 15장 참조). 그분께서는 새긴 우상을 금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4-5).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은 그분의 임재와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불과 구름으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토라(Torah, 창세기-신명기)와 선지서와 사도들의 글(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에서 동일하게 울려 퍼지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악을 멸하시고 세상을 회복하시며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속하시고 열방의 경배를 받으시고 다른 신들을 향한 모든 경건치 않은 우상 숭배를 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성품 가운데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변함없고 영원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애굽기 34:6).
피터 패스트 목사(Rev. Peter Fast)
Bridges for Peace 캐나다 지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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