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독교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해야 할 세 가지의 전환(轉換)이 있다. 그것은 생각의 전환과 마음의 전환 그리고 지갑의 전환이다.” 16세기 기독교 리더들이 말한 이 격언은 성도와 물질의 관계가 오랫동안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성경은 우리뿐 아니라 주님께서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 기도에 대한 구절은 500개가 넘고믿음에 대한 구절은 500개가 조금 못 되지만 물질에 대한 구절은 무려 2000개가 넘습니다. 또 예슈아께서 가르치신 내용의 15퍼센트가 물질과 재산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중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이것을 다루기 어려운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풍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나눔은 여전히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쟁점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일부 비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이 물질에 관한 성경 구절들을 개인적 유익을 위해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전세계적으로 전쟁이나 자연 재해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원조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의 메일함에는 기아와 질병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 전쟁으로 찢겨진 나라에서 고통받는 아이들, 무너져가는 자연 환경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넘쳐납니다. 교회들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때로 평소보다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한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목사님들에게도 각종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호소문이 쇄도합니다. 최근 사역자로 일하는 제 친구는 이런 요청을 응대하는데 하루 일과의 40퍼센트를 보낼 때도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절실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합법적이고 타당한 것이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것을 어디에,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요? 이 문제는 보다 복잡합니다. 성경적 관점에서의 나눔은 단순히 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시간, 전문적인 기술, 은사 때로는 자원하는 손길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시간과 물질을 비롯해 우리가 소유한 대부분의 것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한정적인 자원을 가진 우리는 쇄도하는 요청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누구에게 얼마를 줄 것인가?’가 아니라 ‘기부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기부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무엇이 나눔에 동기를 부여하는가?
최근 자선에 대해 연구하는 한 웹사이트는 크리스천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기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은 목록을 발표했습니다.
위 목록은 기부를 하는 다양한 이유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15개 중 14개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는 사람이 얻는 유익이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마지막 이유만이 성경에
근거한 동기와 진정한 이타적 자세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나누는 자들에 대해
아무것도 나누지 않는 사람들만큼이나 강하고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1-4)
예슈아께서 “구제할 때에(when you give to the poor)”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만일 구제를 하려거든(if you give to the poor)”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이 덜 가진 자들의 필요에 대해 민감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잘못된 동기와 이유로 구제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셨습니다. 구제의 행위는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그 속에 숨은 마음과 동기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구제가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영향을 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제는 사실상 예배입니다. 예슈아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돈은 배고픈 누군가에게 음식을 전해주기도 하고 교회의 재정에 보탬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그분 앞에 드리는 제사로 여기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6절에서 이 원리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부자’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려줍니다. 자칫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오로지 내가 받기 위해 남에게 주는, 자기중심적인 뜻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같은 원리가 본질적으로 이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가복음 6장 31절과 마태복음 7장 12절에 등장하는 말씀, 즉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예슈아의 가르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누가복음 6:31)
이것은 유대교의 근본 원리와 동일한 것으로, 토라(Torah, 창세기-신명기)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특별히 레위기 19장 18절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 나라의 기부자’는 올바른 동기에서 행해진 나눔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타인의 행복을 바라고 자신이 사랑과 돌봄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사랑하며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쩨다카 – 공의의 나눔
쩨다카(tzedakah)는 자선 또는 구호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혹은 가치 있는 일에 도움, 원조, 물질을 제공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비와 관용 그리고 덜 가진 자에 대한 너그러운 태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쩨다카에는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공의, 정의, 공평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단순히 관대한 행동을 넘어 정의롭고 공의로운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는 우리보다 덜 가진 자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선은 유대인들의 삶에서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수입의 최소 10퍼센트를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고 가족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동전을 모으며 청소년들은 마을과 공동체 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집집마다 다니며 기금을 모금합니다. 유가족들이 고인을 기억하며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것 역시 보편적인 일입니다. 나눔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를 표현하고 그분 앞에 용서를 구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받는 사람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에 대한 평판과 진실성은 신중하게 지켜질 뿐 아니라 결코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보다 덜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이 없다면 나머지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나눔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 내 일부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따라 구제를 하는 반면 크리스천들은 자원하는 마음에 따라 구제를 하기 때문에 훨씬 더 관대하고 사랑이 많다는 잘못된 비교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쩨다카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 같은 평가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마땅히 행할 일이라고 느끼고 실천하는 유대인들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도덕적 헌신에 따라 행하는 크리스천들 모두 마태복음 7장 12절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쩨다카를 넘어서
12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토라 교사였던 모세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는 구제가 10퍼센트의 의무를 행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 습니다. 그는 특별히 쩨다카에 수준이 있고 몇몇 쩨다카는 다른 것에 비해 더욱 훌륭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면서 탈무드(Talmud, 랍비의 주석서)에 그 목록을 기록했습니다. 그 목록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은 마지 못해 나누는 사람, 잘못된 동기에서 나누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이 없으며 의무감에서 구제할 뿐입니다. 다음으로는 얼만큼 나누어야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보다 적게 나누되 즐거움으로 내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기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부를 낭비합니다. 다음은 요청을 받았을 때에만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자랑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아울러 쩨다카를 거부하는 것 역시 죄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기부자’는 누군가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익명으로 구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크리스천 신학에서 볼 때 이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부자’는 자신의 행동을 알리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나누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시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수준은 받는 사람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받는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돌보는 것은 받는 사람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역사의 과정을 변화시킵니다. 받는 사람의 가족과 그 후손들은 이제 새롭게 얻은 성공의 기회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세드 – 자비의 나눔
히브리적 뿌리를 가르친 교사 드와이트 프라이어(Dwight Pryor)는 일평생 단 하나의 히브리어 단어만 배워야 한다면 헤세드(chesed)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헤세드는 자비, 은혜, 사랑 등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여기에 능력, 불변함, 관대함이라는 의미가 빠진다면 불완전해지고 맙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측량할 수 없고 무조건적이며 부드럽고 넘치는 사랑으로 영원 불변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특히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쓰인 헤세드는 선택된 백성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으며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히브리어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헤세드 역시 감정이나 태도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 이상의 행동까지도 포함합니다. 어떤 이들은 헤세드를 사랑의 관심과 구체적인 행동이 합쳐진 것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로이스 티어베르그(Lois Tverberg)는 《랍비 예수의 길을 걷다(Walking in the Dust of Rabbi Jesus)》라는 저서에서 헤세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평생토록 지속되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로 나타낼 수 없는 보다 깊고 더욱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바로 헤세드입니다. 언약적 관계에 근거한 헤세드는 영원까지 지속되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같은 신실함을 의미합니다(이사야 54:10). 또 헤세드는 오래 견디는 사랑으로 어떠한 죄악이나 배신에도 끊어지지 않으며 상한 것을 고치고 용서를 베풀기까지 지속되는 사랑입니다(예레미야애가 3:31-32).”
성경 학자인 존 오스왈트(John Oswalt)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헤세드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탁월한 단어입니다. 헤세드는 능력과 권위를 가진 자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완전한 자비와 관용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인간과 달리 하나님은 변덕스럽거나 의존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거나 욕심이 많은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시고 진실하시며 공의로우시고 후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더 온전히 알기를 사모하며 그분 앞에 간구합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13절) 주님께서는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 그분의 영광으로 모세 앞을 지나시며 그분의 이름, 그분의 성품을 선포하십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단순히 대상을 구별하여 부르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며 영혼과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34장 6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품, 그분의 실체, 그분의 본질을 인류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용하신 단어 중 하나가 헤세드입니다. 본질상 하나님께서는 베푸시는 분이시며 풍성한 생명이시며 사랑이시며 그분의 피조물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오나니…” (야고보서 1:17) 사도 야고보는 이 모든 것이 하늘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33편 5절에는 하나님께서 쩨다카를 귀히 여기시며 그분의 헤세드가 온 땅에 충만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라의 가르침에 따른 나눔
유대인 현자 R. 심라이(R. Simlai)는 토라가 헤세드의 행위로 시작하여(아담과 하와에게 생명을 주심) 헤세드의 행위로 끝난다고(모세를 장사 지냄) 설명했습니다. 토라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들을 향해 끊임없는 사랑과 자비를 행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 즉 헤세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이것은 또한 우리가 모방해야 할 핵심입니다. 미드라쉬(Midrash, *역주: 유대교 랍비의 성경 주석)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주 여호와를 따라 걸으라. 그분의 길로 행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었습니다. “누가 여호와의 길로 행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는 회오리 바람과 광풍에 다니시고 구름은 그분의 발의 티끌이라’ (나훔 1:3)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의 길은 은혜와 진리이며 사랑과 자비의 행위이다.”
미드라쉬는 토라의 시작과 과정과 끝이 모두 헤세드라고 설명합니다. 토라의 핵심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본질은 헤세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을 이 본질로 부르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길로 행하라고 가르친 것은 헤세드의 삶,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지존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과 자비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 속에 이 성품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랍비 엘리야후 데슬러(Rabbi Eliyahu Dessler)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긍휼히 여기고 후히 주는 능력을 가졌음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 안에는 주고자 하는 마음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존재하고 이 두 마음이 끊임없이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우리는 늘 완고한 이기심과 깊은 자비심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진정으로 나누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태초부터 주는 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데슬러는 토라의 삶, 하나님의 길로 행하며 그분께 붙들리는 삶을 살 때 우리가 창조된 목적 –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와 관용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기부자’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예슈아께서는 우리에게 헤세드의 모범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자를 돌보고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5절에 예슈아께서는 특히 그분의 육신의 가족들을 향해 이러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헤세드를 끼치되 특별히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헤세드를 끼치는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부자 현자들은
“내일은 누구, 누구를 도와야지, 내일은 이런, 이런 도움을 주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현자들은 이 사람이 에덴 동산의 의인들과 함께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 이 사람을 천국과 연결 지을 수 있을까요? 현자들은 또 다른 질문으로 답합니다. 힘들었던 긴 하루의 끝을 마무리하며 아무도 보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이 사람이야말로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자, 이웃을 돌보는 것이 자신의 존재의 일부인 자, 헤세드가 자신의 본성인 자,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기부자’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남을 도울 수 있는 많은 돈이 있다면 전부 한 사람에게 주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이를 나누어 여러 사람에게 주는 게 나을까요? 유대교 전통에서는 적은 금액으로 나누어 많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제의 습관을 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것은 친절한 행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본성이 친절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기부자’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많은 도움이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예슈아께서는 가난한 자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로 가득한 메일함과 마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유감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우리 아버지께서 풍성하고 후히 주시는 분이라는 것과 우리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의 행함을 통해 이 세상에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기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가 된다는 것, 그분과 함께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분의 눈동자로 택하신 백성을 돌보며 우리 삶 속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께 붙들린 바 되어 그분의 길로 행하고 기쁨으로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사는 것을 바라보는 것, 하나님께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쉐릴 하우어 목사(Rev. Cheryl Hauer)
Bridges for Peace 국제개발부 담당 이사
Abrahams, Israel. R. Simlai. London: Archibald Constable & Co. Ltd., 1907.
Carmel, Rabbi Aryeh and Friedländer, Rabbi Chaim (eds.). Eliyahu Eliezer Dessler Michtav Me-Eliyahu. English translation in “Strive for Truth” and “Sanctuaries in Time,” Vol. 1, pp 32-51, Feldheim Publishers, Inc.
Oswalt, John. Quoted in Our Rabbi Jesus; “Hesed: Enduring, Eternal, Undeserved Love,” blog entry by Lois Tverberg, May 2, 2012; http://ourrabbijesus.com/2012/05/02/hesed-enduring-eternal-undeserved-love/
Tverberg, Lois. Walking in the Dust of Rabbi Jesus. USA: Harper Collins, 2012.
Vine, W.E.; Unger, Merrill F.; White, William Jr. (eds.). 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Biblical Words.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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