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 (Our Father)

예수님/예슈아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셨습니다. 에릭 본 아티젠(Eric von Atzigen)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다니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는 약 110페이지에 걸쳐 그분의 사역과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고 그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약 25,000단어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 181회 가르치셨는데, 이를 계산해보면 140단어 중 1단어 꼴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적인 목적과 메시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주기도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님/예슈아께서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구절로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들었을 때 다른 유대교 기도문들과 비슷하게 들려서 놀랐습니다. 실제로 유대교 핵심 기도문인 아미다(Amidah)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아미다(Amidah) 기도문 중에서

(Mikhail Levit/shutterstock.com)

우리를 우리 아버지께로 당신의 토라에게로 돌이키소서 우리를 우리 왕께로 당신을 예배하도록 이끄소서
우리가 당신에게 돌아오게 하사 전심으로 회개하게 하소서 당신을 송축합니다 속죄를 원하시는 주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죄를 지었나이다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 왕이여 우리가 잘못을 범하 였 나이다 당신은 선하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을 송축합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

많은 역사가들은 아미다 기도문이 제2성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읽는 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시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예슈아와 제자들은 이 기도문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고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개념에 매우 익숙했을 것입니다.
그럼 이와 관련된 타나크(Tanakh, *역주: 구약 성경을 칭하는 유대교 용어)의 몇몇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라(Torah, 율법서: 창세기-신명기) 중에서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신명기 32:6)

케투빔(Ketuvim, 성문서) 중에서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역대상 29:10)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편 68:4-5)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편
89:26)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비임(Neviim, 선지서) 중에서

(shahafsuarez/pixabay.com)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사야 64:8)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 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예레미야 31:9)

그 외 성경 자료

초기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을 담은 미쉬나(Mishnah)에 따르면, AD 70년에 제2성전이 파괴되기 전
유대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의지하리라” (Mishnah Sotah 9:15)

헬라인으로서 유대교 현자였던 벤 시라(Ben Sira)는 예수님/예슈아보다 200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저서에 기록된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오 주님, 내 삶의 주인이요 아버지시여… 오 주님, 내 삶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시여” (Ben Sira 23:1,4) “주여,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환란 날에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교만한 자 앞에서 나를 도울 자 없나이다” (Ben Sira 51:10)

사해 사본 조각에서도 “우리 아버지”라는 제목(4Q511 fragment 127 line 1)과 “나의 아버지”라는
제목(Cave 4 fragments 4Q372)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수님/예슈아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신 것이 당시 유대교 관습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표현은 타나크(Tanakh,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등장할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 성경이 아닌 다른 여러 기록물에도 쓰였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처음으로 사용하신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시편 89장 26절을 비롯해 벤 시라(Ben Sira)와 사해 사본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을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매우 비판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고” 이로 인해 당시 일부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30)는 말씀을 믿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급진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습니다.

문화적 오해

(Oleg Ivanov IL)

엘리 리조르킨-아이젠버그 박사(Dr. Eli Lizorkin-Eyzenberg)는 “성경은 다시 쓰여질 필요는 없지만 다시 읽혀질 필요는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고유의 문화적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 성경)는 2천 년 전에 쓰여졌고, 타나크(Tanakh, 구약 성경)는 그보다 훨씬 전에 쓰여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히브리 문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성경이 쓰여진 본래의 언어로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번역된 언어로는 전달되기 힘든 언어적, 문화적 의미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본래의 독자 혹은 본래의 청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를 계속해서 질문하곤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1세기 저자들과 독자들은 오늘날과 같이 완전한 책으로 엮인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 성경)를 가지고 있지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성경”이라고 말할 때는 타나크(Tanakh, 구약 성경)를 의미했으며, 그것이 당시 그들이 가진 유일한 성경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약 성경이 AD 50년에서 15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 성경)는 4세기가 될 때까지 완성본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Anissa Thompson/freeimages.com)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우리는 많은 것을 떠올립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그리고 배우자와 함께 새로운
생명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가는 창조적인 과정에 참여합니다. 좋은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여 그들이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자라도록 합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보살피고
공의(올바른 삶)를 가르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때에 따라 체벌을 통해 훌륭한 성인이 되도록
양육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예배하는 삶을 살고 하늘의 상급을
쌓도록 준비시키시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비록 이 세상의 아버지들이 전부 좋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분이십니다. 어린 시절 저는 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아버지의 행동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 혹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지 언제나 다 이해하지는 못하며,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예슈아와 유대인 제자들이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분명 타나크(Tanakh,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과 진리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봅시다.

 

자비하신 아버지

(freebibleimages.org)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35-36)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즉시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 7절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의 자비의 13가지 속성이라고 불리는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분에 대해 선포하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가 몇 가지 등장합니다. 라훔(rachum, 긍휼, 자비), 하눈(chanun, 은혜), 아라크(arach, 인내, 노하기를 더디함), 헤세 (hesed, 친절, 사랑, 인자), 에멧(emet, 진리, 진실) 의 다섯 단어입니다. 아버지의 자비하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은(제자들을 포함해) 출애굽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도록,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의 성품을 닮아 가도록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분의 자녀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임과 동시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따라야 하는 모범이었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은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또 다시 강조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야 하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선하신 공급자

(Jesus Cervantes/shutterstock.com)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9-12)

 

이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선하신 공급자로 나타납니다. 좋은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아버지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줄 것을 압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먹을 것을 공급해 주리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좋으신 분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편 37:25)

위의 마태복음 말씀에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신 것은 타나크(Tanakh, 구약 성경)의 세 부분 중 두 부분, 즉 토라(Torah, 율법서: 창세기-신명기)와 네비임(Neviim, 선지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예슈아께서는 공급자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이 타나크(Tanakh,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고 이삭을 대신할 제물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은 공급자인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세기 22:14)

또 그들은 조상들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던 중 광야에서 온 민족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근의 때에 엘리야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음식을 전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저는 날마다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자원봉사자로 처음 이스라엘에 왔을 때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예슈아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11) 당시 우리에게 이 구절은 단순히 외워서 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필요했습니다. 처음 몇 년간 매우 적은 수입으로 생활해야 했던 우리는 반복해서 주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배웠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 분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17)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말라기 3:6)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거룩하고 의지할 수 있는 육신의 아버지를 둔 자녀는 아버지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또 이런 아버지들은 진정한 사랑이란 자녀들이 거룩하게 자라도록, 책임감 있는 성인이 되도록 돕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녀들을 훈련시키고 선한 행동을 가르치고 때로 필요할 때는 체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좋든 나쁘든, 있든 없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랍비 샤울 로젠블라트(Rabbi Shaul Rosenblatt)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유대교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육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그분의 자녀들의 행복을 바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부분과 육적인 부분이 상충할 때는 언제나 영적인 부분이 우선 순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이 더 가치 있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잘못할 때 멀리서 지켜만 보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더 나은
인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은 때로 우리에게 힘든 것을 견뎌내도록 요구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십니다. 때로 부모는 그들의 자녀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딸 아이의 흔들리는 이를 뽑았고 딸 아이는 저를 매우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딸에 대한 사랑에서 행한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으로 행하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늘 쉽지는 않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보살피시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좋은 부모에 비할 수 없는, 그보다 훨씬 더 좋으신 분이십니다.”

진정으로 믿음이 성숙한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면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신명기 8:5-6)

잠언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3:12)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12:5-11)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예수님/예슈아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많은 성품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나라와 민족을 위해 행하신 많은 이야기들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이유들이 충분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보호해 주셨고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으며 자비를 베푸셨고 책망하셨으며 말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그분의 따뜻한 성품에만 집중하고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성품은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시며 인자가 많으시며 정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치유자이시며 재판관이시고 진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그분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십니다. 그분은 은혜로 충만하십니다. 그분은 신실하시고 순결하시고 진실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가 그분의 길로 걸을 때 우리에게 축복이 임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말씀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12:32) 이러한 내용은 요한계시록 22장
18절에서 19절에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예수님/예슈아께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아버지께 집중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길 바라시는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된 우리를 통해 그분의 성품이 세상에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레베카 J. 브리머 목사(Rev. Rebecca J. Brimmer)

Bridges for Peace 국제회장 겸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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