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들을 생각하라 (Think on These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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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저는 즐겨 읽는 잡지에서 “정보의 시대는 끝났습니다”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몇 페이지를 넘기자 “경험의 시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저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며칠 뒤, 제 책상 위에는 “분노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젊은이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기사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일까?” “주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많은 자료들을 조사하고 연구한 저는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답을 찾아냈습니다. 정신과 의사에서 목사까지, 사업가에서 대학 교수까지, 베이비붐 세대에서 밀레니얼 세대(*역주: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 세대로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출생한 세대를 일컬음)까지, 모든 이들이 동의할 만한 답은 오늘날 우리가 “냉소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냉소주의의 정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소 변화를 보여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냉소적인 사람은 세상적인 소유와 욕심을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에서 냉소적인 사람은 쌀쌀한 태도로 세상을 비꼬며 비판을 일삼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쉽게 타락하고 모든 가치를 무너뜨리며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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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냉소주의자들은 불확실하고 부정적인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정부와 이웃은 믿지 못하는 반면 인터넷에 올라오는 거짓 뉴스와 음모론에는 쉽게 현혹됩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도 그들의 순진함을 조롱하며 더욱 의심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세계관을 조장합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늘 회의적인 사람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또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두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 건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 역시 잘못된 교리나 속이는 영에 미혹되지 않기 위해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현대 사회의 회의적인 태도가 적정 수준을 넘어 건강을 해칠 정도라고 우려합니다. 냉소주의자들은 정부와 정치와 언론에 대해 매우 높은 불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30년 전 만해도 미국 국민의 약 50%는 정부가 국민들의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정부를 신뢰하는 국민은 단 16%에 불과합니다. 또 영국 국민의 이웃 및 주변에 대한 신뢰도는 1959년 56%에 달했지만 지금은 20%까지 하락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는 정부와 이웃뿐 아니라 사회의 조직이나 기관에도 적용되며 심지어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젊은 세대는 어떨까요?

조지아 대학(University of Georgia)과 하버드 대학(Harvard University)의 최근 연구는 밀레니얼 세대가 역사상 가장 냉소적인 세대라는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십여 년 동안 과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기준들이 흐트러졌습니다. 대학 학위는 좋은 직장을 의미했고 정부는
국민들의 사생활을 존중했으며 사람들은 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기성 세대가 세웠던 이러한 기반은 오늘날 젊은 세대의 발 아래 산산히 부서진 것만 같습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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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미국만이 아닙니다. 유럽과 호주에서 진행된 연구들 역시 유사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과거 어떤 세대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더 많은 기회를 누리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주변 세계에 대한 그들의 믿음도 무너졌습니다.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모든 정보가 손 안에 있고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인터넷에는 진짜 뉴스와 가짜 뉴스가 쏟아집니다. 젊은이들은 나태함과 순진함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고, 결국 모든 것을 믿거나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대체로 조직이나 기관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친구나 동료를 의심하며 부모가 사실이라고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도록 길러졌으며, 어떻게든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냉소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문제는 일반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냉소적인 태도는 실망과 고통과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최근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유명한 크리스천 리더들이 죄에 빠져 대중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에 환멸을 느끼는 크리스천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쁜 뉴스는 팔리고 좋은 뉴스는 팔리지 않는다’는 세상의 사고방식이 교회에도 스며들어 불만과 불평의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앤드류 바이어스(Andrew Byers)는 그의 저서 <환상 없는 믿음: 냉소적인 성인 예수를 따라(Faith Without Illusions: Following Jesus as a Cynic-Saint)>에서 냉소적인 크리스천에 대해 ‘고통스러운 환멸을 경험하고 적대적인 태도로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고, 이것을 병으로
분류했습니다.

바이어는 냉소주의를 ‘새로운 영적 흐름’이라고 칭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어두운 함정에 빠져들었고 냉소주의는 크리스천들이 자신을 나타내는 정체성이 되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습니다. 냉소주의가 새로운 영성으로 떠오르면서 종교적 회의와 각성이 영적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냉소적인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이어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냉소적인 크리스천은 어린 시절 여름 성경 학교에서 단체 티셔츠를 입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시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일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What Would Jesus Do?)”라는 문구가 적힌 오래된 팔찌를 발견하게 되면 무척 창피하게 여깁니다. 오로지 재미로 크리스천 팝 뮤직 라디오 방송을 듣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너무 많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 하고 성경 공부 모임에서는 쏟아지는 많은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변을 회피하면서 너무 영적으로 보일까봐 걱정합니다. 때로 다른 크리스천이 인생 길에서 지뢰를 밟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또 회의적인 태도로 인해 결국 믿음을 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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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성경은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과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냉소적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모세의 모든 결정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고 그의 리더십에 반란을 일으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예입니다.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는 자기 자신을 삼키는 독과 같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명백했습니다. 선지자들 중에서도 특히 요나는 의심이 많고 자신이 처한 환경에 환멸을 느낀 냉소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의 죄값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다른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백성들의 죄를 판단하고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했으며 세상에 대해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냉소적인 세상에 맞서 외치는 자들이었고 무관심하고 냉담한 모습으로 불만과 불평을 일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촉구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메세지는 냉소가 아닌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조들의 믿음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으며, 모세는 살인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는 목자이자 유대교에서 가장 큰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조상들의 믿음과 순종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

우리는 종종 성경을 인생의 지침서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돌이키게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삶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까지 가르쳐 줍니다. 시편, 잠언, 토라(Torah, 창세기-신명기),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는 유혹을 이기고 대적을 피하고 하나님과의 즐거운 관계 속에 살아갈 수 있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냉소주의는 기쁨을 빼앗고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불신과 불만과 불평은 믿음과 감사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 빌립보서 4장 8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마치 독처럼 퍼지는 자기 생각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생각을 다스리고 마음을 훈련시켜 주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부정적인 사고와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들에 집중해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에든지…

바울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로기조마이(logizomai)는 생각하다, 여기다, 추정하다, 계산하다는 뜻입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사실적인 정보를 이해하고 적용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의미를 더했습니다. 일반적인 사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진리에 대해서도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켜 이것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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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말씀은 진실/진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냉소주의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진리/진실은 모든 면에서 비교와 판단을 받는 반면, 사실은 어떤 입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받아들여집니다. 여러분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저에게는 진실이 아닐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진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진리/진실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알레테이아(aletheia)로, 사도들의 서신서 전체에 187회 등장하며 확실하고 지속적이며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예슈아에 대한 말씀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J. D. 왓슨 박사(Dr. J. D. Watson)의 저서 <오늘의 단어(A Word for the Day)>는 진리/진실에 대해 절대적이고 명백하며 반박할 수 없고 논쟁의 여지가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것이 진실/진리라면 그것은 언제나 참되며 결코 거짓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며 우리는 그분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용서는 실제적인 것이며, 만족하는 삶은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진실이요, 진리입니다. 왓슨 박사는 우리가 가진 질문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무엇이든 우리는 항상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경건을 뜻하는 단어는 셈노테스(semnotes)입니다. 이것은 숭고하고 위엄 있고 거룩하고 존경심을 일으키고 신성을 나타내는 단어이며 때로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품위와 질서를 가져오는 윤리적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서 66장 2절에서 경건한 사람은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로 표현되었으며, 시편 119편 1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두므로 범죄치 아니하는 자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나타나고 진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반응을 결정합니다. 경건한 자는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말씀이 그 마음의 즐거움이 되는 사람입니다(예레미야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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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정결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하그노스(hagnos)입니다. 이것은 본래 의식적인 깨끗함을 뜻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모든 부분에서 순결함을 이끌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정결하고 도덕적으로 정숙한 삶을 살아야 하며 성적으로 순결해야 하고 잘못된 교리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신부는 몸과 마음이 깨끗한 상태로 신랑 앞에 서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헬라어 단어는 디카이오스(dikaios)로 정의를 뜻합니다. 이것은 곧은 것, 옳은 것을
의미하며 히브리어 단어 사디크(saddiq)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나크(Tanach, 구약)에서는 하나님 외에는 의로운 자가 없다고 말씀하며,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구약)에서는 크리스천의 의로움은 예수님/예슈아라고 말씀합니다.

이 단어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뿐 아니라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의로움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의로운 생각과 의로운 행동을 해야 하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의로움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헬라어로 프로스필레스(prosphiles)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인의 신구약 단어 해설 사전(Vine’s Expository Dictionary)에 따르면, 이것은 만족스러움과 즐거움과 상냥함을 의미합니다. 의로움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과 행동을 통해 사랑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동기를 부여해야 합니다. 거짓말, 도둑질, 저주, 험담 등 경건하지 않은 행동을 피하고 애정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자비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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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바울은 칭찬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가치 있고 발전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하며 듣는 사람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들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무슨 … 있든지”라는 구절로 덕과 기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덕은 헬라어로
아레테(arête)입니다. 전통적인 헬라어에서 이것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포함하는 모든
탁월함을 일컬으며, 인간에게 있어 가장 높은 수준의 선함을 의미합니다. 왓슨 박사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인간의 선한 도덕심을 바탕으로 그보다 더 높은 것들을 생각하도록 권면했다고 설명합니다. 즉, 도덕적인 것이나 가치 있는 것 혹은 인류의 미덕을 포함해 모든 탁월한 것들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우리에게 기림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는 위를 뜻하는
헬라어 에피스(epis)와 찬송을 뜻하는 헬라어 아이노스(ainos)가 함께 사용되었으며, 칭찬, 승인, 박수, 대중의 인정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에 17회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박수와 칭찬과 인정을 받을만한 일을 생각해야 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합당한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앞서 우리는 냉소주의가 무엇인지 살펴보았고, 그 특징으로 믿음의 결여, 불신, 무관심, 부정적인 태도 등을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 결과, 사실상 이 모든 것들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말씀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이 쉽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의 단어(A Word for the Day)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유익한 사고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자동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향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나태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발전하기보다 퇴보하기 쉽습니다. 거룩한 삶의 비밀은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울의 말씀에 따라 “이것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안의 냉소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주님께서는 용서로 응답하시고 우리의 세계관을 바꿀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 –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맺게 되고 이 열매들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부정적인 태도를 대체할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진실로 우리의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에 진리가 있고 우리의 마음에 만족이 있고 우리의 행동에 사랑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울이 말씀한 “이것들을 생각하는” 영적인 훈련입니다.

쉐릴 L. 하우어 목사(Rev. Cheryl L. Hauer)
Bridges for Peace 국제개발부 담당이사

Bibliography

Byers, Andrew. Faith without Illusions: Following Jesus as a Cynic-Saint. USA: IVP Books, 2011.

“Harvard Poll Finds Millennials Have Little Faith in Government, Media,” USA Today.com

http://www.huffingtonpost.com/joseph-grant/the-age-of-cynicism_b_7923116.html “The Age of Cynicism”

http://onbeing.org/blog/the-age-of-cynicism “The Age of Cynicism”

Vine, W. E. 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Old and New Testament Words. USA: Thomas Nelson Publishers, 2003.

Watson, J. D. A Word for the Day. Tennessee, USA: AMG Publishers, 2012.

www.mtv.com/news/1920597/millennials-clinical-study/ “Millennials are the Most Cynical Generation Ever, Study Fi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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