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Freedom)

Fernando Cferdo/unsplash.com

코로나가 시작된 지 일 년 반이 넘어가면서 저는 지난 16개월 간의 팬데믹이 인류에게 가져온 변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립되고 격리되었으며,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생활하며, 지난 일 년 동안에 남은 평생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손을 씻고, 다른 사람들과의 간격을 최소 2미터 이상 유지하고 있습니다. 친근한 신체 접촉, 악수와 포옹과 뺨을 맞대며 인사하던 나날도 지나갔습니다. 여행도, 극장이나 공원에서 보내는 오후도, 먼 곳으로의 비행도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일상이 완전히 혼란에 빠진 것을 보았으며, 직장과 사랑하는 이들을 잃기도 했고, 모든 문제에 대해 항상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능력이 착각임을 깨달으며 무력감을 경험했습니다. 즉각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 우리는 집 안에 갇혀 감염률이 상승하는 것을 보면서 힘없이 기다려야 하는 새로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저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자유를 주님께 부르짖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적의 압제에서 해방되기를, 제가 원하는 대로 오고 가는 자유를 되찾기를, 교회에서 수 백 명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우리 집을 가족들과 친구들로 가득 채워 다같이 삶을 축하하기를 갈망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제 마음의 열망은 출애굽기 13장에서 17장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 본문은 매우 실재적이고 눈에 보이는 적으로부터 압제를 당하며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이 기적적인 구원을 통해 자유에 이르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저의 짧은 팬데믹 경험은 그들이 400년 동안 애굽인들의 손에서 당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에 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수 천년 전 유대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교훈으로 가득합니다.

 

기적적인 구원!

 

400년은 긴 시간입니다. 사실 미국의 역사보다도 깁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 그들의 조상들이 경험한 만유의 하나님의 실재로부터 단절될 만큼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점점 더 먼 꿈과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수 세기가 지나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겠다는’ 생각은 천천히 사라져가고, 결국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그들의 유일한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그분께서 들으실 때까지 수 없이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시간에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이었는지요! 그들은 마침내 애굽을 떠났을 뿐 아니라 애굽의 부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신들을 패배시키는 재앙을 하나 하나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궁극적인 신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손에 미래가 있다고 믿었던 애굽 왕 바로와 모세가 반복해서 언쟁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에 죽음의 영이 내려와 사람과 가축의 초태생을 쳤을 때 애굽인들의 괴로움을 들었습니다. 과연 누가 이 초라한 노예 집단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권력으로부터 자신들과 자녀들의 목숨을 지킬 뿐만 아니라 애굽인들의 은과 금까지 가지고 걸어 나갈 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과연 누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바다를 가르고 바위에서 물을 내고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는 등 우주의 자연적인 힘을 무력화시키면서까지 400년 동안 그분의 음성을 듣지 않던 백성들을 구원하실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저는 종종 크리스천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애굽에서 하신 일들을 금새 잊고 한탄하고 불평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물이 없는 연고로 사흘이 채 안 되어 불평과 근심과 분노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며칠 후, 그들은 또 음식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알고 그분의 나라 가운데 삶의 기적들을 경험했지만 팬데믹 동안 마음에 근심과 염려와 우울함이 가득 찬 오늘날의 많은 크리스천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쉽게 잊어버리는 건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히브리인들의 신을 신고 1킬로미터라도 걸어본다면, 우리는 덜 비판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자유케 하는 일을 위임받아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백성들의 눈에 그는 아직 불확실한 존재였습니다. 비록 누이와 형이 살아있었지만, 모세는 그들과 함께 자라지도 않았고 백성들 가운데서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노예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는 바로의 궁정에서 자란 애굽인었습니다. 그가 취한 첫 번째 행동이 오히려 바로의 분노를 일으켜 백성들이 짚 없이 벽돌을 만들게 된 결과를 낳은 것은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을 압니다. 분명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기적을 행하고 그들을 구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능력을 믿었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체계적인 종교 시스템이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결고리 혹은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토라(Torah, 창세기-신명기)나 오늘날 우리가 유대교라고 부르는 체계가 없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역사의 안개 속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과 400년간의 박해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모세가 항상 신뢰를 받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명령에 의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사막 한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습니다. 심지어 백만 명이 넘는 인원이 먹기에 충분한 식량과 물도 없었으며, 그들이 따르고 있는 리더에 대한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재앙을 목격했지만 처음 아홉 가지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아 보였습니다. 각각의 재앙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풀려난 것은 무서운 죽음의 밤의 끝자락에서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믿을 수 없는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 찬,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은 노예로서의 삶을 증오했지만, 그들이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사막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과 그러한 여정을 충분한 식량과 물도 없이 떠나는 자신들의 어리석은 모습뿐이었습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지금의 우리는 언제나 신실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사 그 여정의 모든 단계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수 세기에 걸친 노예 제도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삶과 자신에 대해 그들이 아는 모든 것들이 그들을 노예로 정의합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주인에게 의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억압을 당하고 고통을 받고 구원을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원했는지 조차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왜 우리를 여기로 데려와 죽게 만듭니까?” 그들은 모세에게 물었습니다. “차라리 우리는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 속에서 이상한 개념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려는 시도로부터의 자유,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는 폭넓은 사고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아는 자유였고, 그들이 경험한 유일한 안전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와 비슷합니까? 우리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 ‘출입금지’라는 작은 푯말이 붙은 장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 인도하는 구원을 우리가 필요로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정한 ‘출입금지’ 장소에 들어가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구원의 여정은 아직 불확실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처럼 보이므로, 우리는 안전한 곳에 머무는 것이 낫겠다고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정체성인 의존에서 벗어나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 즉 의존하고 억압받고 비참하고 탈출구가 없는 괴로움을 겪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만유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들의 고향 땅을 가진 자유로운 백성이 될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언제나 탈출구가 있음을 아는 평화와 번영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옛 정체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 왕의 자녀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능력 안에서 행하는 법을 배우며 전사이자 개척자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이 될 나라를 세우는 설립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수천 년 동안 그분을 온 세상에 나타내도록 선택된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하지만 먼저 그들은 자유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자유란…

 

Nour Wageh/unsplash.com

프리 딕셔너리(Free Dictionary, *역주: 다양한 출처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미국 온라인 사전 및 백과 사전)에서는 자유(freedom)를 외부로부터 부과된 강요나 제지없이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합니다. 즉, 의무로부터의 면책입니다. 자유(liberty)는 자율성, 즉 선택의 자유 및 예속으로부터의 개인적 자유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현대적 개념의 자유는 공동의 책임을 제하는 것으로 의미가 좁혀졌고, 개인적 의지의 표현으로써 ‘자주적 결정’을 장려합니다. 이러한 자유의 개념은 나의 권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능가하는 ‘자기 욕구 충족’으로 빠르게 변하면서, 어쩐 일인지 자유는 주변 사람들의 운명에 거의 혹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개인의 권리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랍비 야코프 신클레어(Rabbi Yaakov Sinclair)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The True Meaning of Freedom)≫에서 모든 인류의 자유의 원형은 출애굽이라고 말합니다. 애굽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압박을 상징했듯이 그들의 탈출은 궁극적인 자유를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책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랍비 신클레어는 토라(Torah, 창세기-신명기)에 언급되는 자유는 언제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명확한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목적 없는 자유는 그 자체가 노예라고 그는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자유의 개념은 호페쉬(chofesh)와 헤루트(cherut)라는 두 단어로 표현됩니다. 둘의 차이점은 단순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해야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호페쉬(chofesh)는 노예가 더 이상 주인이 없고 무엇을 해야 할 지 말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얻는 자유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유로운 영혼이므로 속박에서 해방되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헤루트(cherut)는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형태로 시내산에서 얻은 자유입니다. 바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분명한 헤루트의 내용이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 애굽의 노예로부터의 구원은 만유의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의미했습니다. 헤루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에 자유롭게 묶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랍비 신클레어가 말한 목적이 있는 자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호페쉬를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헤루트의 개념이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호페쉬와 같이 되었습니다. 자유를 향한 외침은 모든 곳에서 들리지만, 대부분은 진정한 자유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기심에서 나온 갈망, 공동의 책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열망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로서 우리에게는 주님의 종이 되기를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로마서 1:1).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보여주는 등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강하게 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에 자유롭게 묶이며, 기쁨으로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합니다. 참된 자유 가운데 행하는 사람처럼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더 큰 본보기는 없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에 관계없이, 저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진정한 왕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쉐릴 하우어 목사(Rev. Cheryl Hauer)

Bridges for Peace 국제 부회장

Bibliography

Brimmer, Rebecca, J. Hauer, Cheryl, Riddering, Teri, Sprinkle, Charleeda. Hebrew Treasures. Jerusalem: Bridges for Peace International, 2011.
“Freedom.” The Free Dictionary. https://www.thefreedictionary.com/freedom
“Liberty.” The Free Dictionary. https://www.thefreedictionary.com/liberty
Sinclair, Rabbi Yaakov, Asher. “The True Meaning of Freedom.” Ohr Somayach. https://ohr.edu/829

  • 결과 보기

Explore